온새미로의 4월은 토머스 엘리엇의 ‘사월은 잔인한 달’이라는 詩 ‘황무지’의 구절로 늘 만난다. 詩人은 아마도 얼었던 땅을 비집고 올라오는 푸르른 생명력을 표현한 것이리라.
온새미로는 현기영 작가님의 [순이 삼촌]을 통해 제주 4.3 항쟁의 상흔을, 유년시절 4.3을 목도한 작가의 자전적 성장소설 [지상에 숟가락 하나]로 제주의 아픔과 아름다움을 만남했었다.
그렇기에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을 향해 늙어가는 나이듦의 깊은 사색 안에 제주의 아픔과 아름다움을 함께 담아낸 현기영 산문집 [소설가는 늙지 않는다]로 4월을 시작했다.
푸릇한 청춘들의 글에서는 느낄 수 없는 연륜과 나이듦에서 나타나는 독선적인 아집과 편견은 보이지 않는다. 늙은 소설가의 깊은 성찰로 삶과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한다.
상흔의 역사를 바꾸려하거나 사실과 진실을 잊으라고 강요하는 국가권력의 시도는 무의미하다. 잊지 않아야 실패한 역사는 반복되지 않는다. 그 상흔의 기억들을 문학이 어루만져주어야 하는 책임과 의무가 있음을 피력한다.
[노년 中에서]
노년은 도둑처럼 슬그머니 갑자기 온다. 인생사를 통하여 노년처럼 뜻밖의 일은 없다. 아등바등 바삐 사느라고 늙는 줄 몰랐다. 그래서 누구나 처음에는 자신의 몸속에 진행되는 늙음을 부정하고 거부하려고 한다. 늙음의 끝에 죽음이 있기 때문이고, 죽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나로서는 죽음 그 자체는 그리 두렵지 않은 것 같은데, 죽어가고 있음을 아는 것이 고통스럽다.
노년도 젊음 못지않게 즐겁고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만이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장작불이 잦아들어 잉걸불이 되었을 때, 조용히, 침착하게, 은근히 사위어가는 불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늙지 않고 싶다고 그래서 늙음을 부정하는 것이 아닌, 그저 삶이 나이 들어가고 있으며 죽음이란 떨어질 수 없는 나의 대상이 된다. 나의 삶에서 새로움을 추구하는 것 보다는 그저 찬찬히 살피고 그 자리에 있음이 행복임을 안다.
[죽은 자는 힘이 세다 中에서]
‘죽은 자는 더할 나위 없이 무력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힘이다’라고 키에르케고르가 말했다, 그리고 억울한 죽음일수록 그 힘은 센데, 4.3 사건의 원혼들이 그렇다, 4.3 사건의 죽은 자들은 오히려 죽지 않고 죽인 자들의 마음속에 옮아가 살아왔다. .... 그러나 가해자들과 그 상속자들은 사죄하기는커녕, 죽은 자들을 다시 한 번 죽이려고 싸움을 벌이고 있다. 그들은 이 죽은 자들을 결코 이길 수 없다는 걸 모르고 있다. 죽은 자는 힘이 세고, 억울한 죽음일수록 힘이 세고, 죽은 자의 시간은 영원하다는 걸 그들은 모르고 있다.
메멘토 모리. ... 행복을 누리는 몸속에 죽음이 깃들어 있는 필멸의 존재이므로 지나친 탐욕을 경계하는 것이다. 불가(弗家)에서도 “인생은 한 조각구름이 일어나는 것과 같고, 죽음이란 구름이 스러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삶과 죽음은 일란성쌍둥이, 삶의 시작은 곧 죽음의 시작이기 때문에 산다는 것은 죽어간다는 것을 뜻한다. ... 현명하게도 죽음을 잘 길들일 줄 알았던 그들에게 죽음은 인생의 완성으로서의 죽음이었다.
좋은 삶이 좋은 죽음을 낳을 것이다. 자연스럽고 상냥하게 다가오는 죽음. 좋은 삶을 산 자에게 죽음은 그 삶의 완성으로서 죽음일 것이다. 메멘토 모리.
한 번 뿐인 인생, 누구나 정해진 죽음을 향해 늙어가는 순간. 굳이 그 늙음을 두려워하기 보다는 지금 이 순간을 즐기고, 지금 내 곁에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 감사하며 행복해 하자. 그런 나이듦은 나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이게 하는 안목과 더 큰 자유와 풍요로움을 준다.
[자작나무의 유혹 中에서]
옛말에 늙으면 흙내가 고소해진다는 말이 있다. 늙어 흙에 묻힐 때가 머지않았다는 뜻인데, 죽음을 두려움이나 슬픔이 아니라, ‘고소한 흙내’로서 흔연히 받아들였던 우리 선인들의 넉넉한 풍류가 가슴을 친다. .... 이제는 더 이상 새 사람을 사귀지 않고, 이왕의 벗들도 전만큼 자주 만나지 않게 되면서, 그 자리를 풀과 나무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이렇게 내가 아주 자연스럽게 풀과 나무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것은 아마도 흙으로 돌아가 내 몸을 구성했던 원소들을 초목의 뿌리에게 내어줄 때를 예감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늙음을 당연하고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여유와 관조. 겉모습은 늙어가지만 품은 생각들은 부드럽게 살아있다. 자연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사람의 마음까지 넉넉하게 바라볼 수 있는 힘은 늙어야 보이는 것들일 것이다. 삶의 길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기에 평안하다.
노년의 작가는 나에게 수만 년의 시간 속에 변하지 않는 영원한 새로움이 있는 강정의 푸른 바다와 꿈틀대는 구럼비바위를 지켜내야만 하는 당위성을 침착하고 분명하게 말해 주었다.
노년의 작가는 나에게, 우리에게 늙을수록 쇠약해지고 추해지는 것이 인생인데, 늙을수록 장대해지고 아름다워지는 아름드리 해묵은 나무, 노거수(老巨樹)의 웅장한 자태처럼 인생의 끝까지 성장을 멈추지 않는 기똥찬 삶을 살아보자고 역설하였다.
노경(老境)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즐거움인 포기하는 즐거움, 아등바등 매달리지 않고 흔쾌히 포기해버리는 것, 포기하는 대신 얻는 자유. 그래서 전보다 오히려 젊어지는 나이듦.
혹독한 시련의 삶을 살아가면서 느꼈던 깊고 묵직한 작가의 사색에서 울림 있는 나이듦을 배운다.
젊음은 지나온 과거이며 늙음은 현재이다. 온새미로, 괜찮은 노인이 되고 싶다.